육식의 성정치

캐롤 J. 애덤스의 “육식의 성정치(The sexual politics of meat)” 25주년 기념판 요약. 비건-페미니즘의 고전으로 꼽히는 책.

원래 순서는 20주년 기념판 서문, 10주년 기념판 서문, 초판 서문, 본문 순인데, 이 요약에서는 시간 순서대로 읽을 수 있도록 초판 서문, 본문, 10주년 기념판 서문, 20주년 기념판 서문으로 기록했다.

저자는 고기meat와 육식meat eating을 구분해서 쓴다. 한국어 번역판의 제목은 “육식의 성정치”이지만 사실은 “고기의 성정치”로 번역하는게 더 좋을 것 같다. 이 요약에서는 고기와 육식을 되도록 구분해서 쓰고자 한다.

초판 서문

처음 채식주의자가 됐을 땐 채식주의와 페미니즘의 관계를 인식하지 못했으나 이젠 그렇지 않다는 말로 시작.

육식이란 동물에 대한 인간의 가부장적 통제이며 이 둘 사이엔 여러 숨은 관련성이 있다고 주장한다. 이 책의 목적은 이러한 관계를 드러내는 것.

저자는 고기라는 텍스트(text of meat)를 이해하는 게 고기의 성정치 논의의 첫 단계라고 말한다. ‘고기’는 동물의 시체가 음식이며 핵심적인 영양원이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고 식사 시간, 광고, 대화 등에서 변치않고 반복적으로 그 의미가 표출되며 식량 생산, 동물에 대한 태도, 동물 학대에 대한 용인 등으로 구성된 일관된 체계를 구성하기 때문에, 고기는 우리가 읽어낼 수 있는 텍스트다.

동물의 살을 음식으로 보는 관념에는 가부장적 태도가 담겨 있다. 목적에 따른 수단의 정당화, 다른 존재에 대한 대상화가 삶의 필수 요소라는 믿음, 폭력은 감춰질 수 있고 마땅히 감춰져야 한다는 믿음 등이 그렇다. 저자는 이 모든 것이 육식의 성정치를 이루는 일부라고 말한다.

페미니즘 이론이 채식주의의 통찰로부터 배워야 할 점을 갖는 것과 마찬가지로, 동물권 이론 또한 페미니즘 원칙들과의 통합을 필요로 한다. 육식은 그동안 항상 존재했으나 보이지 않았던 무언가에 대한 상징이다. 육식은 동물에 대한 가부장적 통제의 상징이다.

제1부. 고기라는 가부장적 텍스트The Patriarchal Text of Meat

제1장. 고기의 성정치The Sexual Politics of Meat

남성으로 인식되기와 육식

세계 거의 모든 육식 문화권에서 남성은 육식을 해왔고 이등 시민인 여성에게는 육식이 허용되지 않거나 제한되어 왔다. 남성으로 인식되는 것male identification과 육식이 동일시되었으며 육식은 남성적인 것, 비육식은 여성적인 것으로 간주되어 왔다.

고기는 남성만을 위한 것

현대 기술 사회에서는 요리책이 “육식은 남성을 위한 것”이라는 가정을 반영하고 있다. 많은 요리책에서 고기가 들어가는 요리는 주로 남성에게 추천된다. 이는 18세기-19세기 영미권에서도 마찬가지였다고. 다만 공급이 충분한 시기나 상황에는 고기 분배의 성차별이 줄어들었다.

고기의 인종 정치

육식은 성차별 뿐 아니라 인종차별 및 계급차별과도 연결되어 있었다. 육류가 부족하면 백인 지배계급에게 차별적으로 공급되었다. 19세기에도 지식 노동자brain worker는 육식을 해야하고, 야만인savage과 낮은 계급 사람들에겐 육식이 필요없다는 의학적 소견이 있었을 정도.

카니발리즘은 “캐리비안 사람들”을 스페인 정복자들이 잘못 발음해서 만들어진 단어라고 한다. 정복자들은 원주민들이 식인을 한다고 누명을 씌워 정복을 합리화했다. 하지만 식인에 대한 근거는 거의 없었고, 식인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유럽인들이 비인간동물을 먹는 것과 무슨 차이인지 알 수 없다.

고기가 왕

저자는 남성의 힘과 육식을 연결하는 미신이 존재한다고 말한다. 강한 동물의 근육을 먹으면 우리도 강해질 것이라는 믿음. 남성은 강하고, 강해야만하므로 남성에겐 육식이 필요하다는 식의 합리화가 일어난다.

“고기가 왕”이라는 말은 고기가 남성 권력을 상징하는 단어임을 드러낸다. 채소는 고기 아닌 모든 것을 이르는 말로 쓰이기도 한다. (우리말에서도 “풀때기만 먹고 어떻게 사니?” 같은 표현에서 “풀때기”가 고기 아닌 모든 것을 이르는 의미로 쓰이곤 한다. —ak) 식사에 있어서 고기는 대체 불가능한 핵심 요소로 인식된다. 이등 시민이 먹는 이등 음식인 채소는 고기의 자리를 위협할 수 없다. 여성이 왕이 될 수 없으니 여성의 음식 또한 왕이 될 수 없다는 메시지가 담겨 있다.

젠더 불평등과 종 불평등

젠더불평등은 종불평등과도 연결된다. 육식을 하는 대다수 문화권에서 사냥을 남성이 하기 때문이다. 인류학자 Peggy Sanday는 비기술기반 문화권에서 채식 기반 경제와 여성권력, 육식 기반 경제와 남성권력 사이에 상관 관계가 존재함을 발견했다. 육식에 의존하고 사냥감이 클수록 남성이 육아에 덜 관여하는 현상도 나타난다.

식물: 여성적 수동성의 상징?

한편 남성men과 고기meat는 모두 역사적으로 그 사전적 의미가 축소되었다. 원래 “man”은 모든 인간을 뜻했으나 이젠 여성을 포함하지 않고, “meat”은 모든 음식을 뜻했으나 이젠 그렇지 않다.

한편 영어에서 “meat”에는 “무언가의 핵심적인 요소”라는 의미도 부여되었고, 식물vegetable는 수동성의 상징이 되어버렸다. 특히 vegetable은 그 뜻이 완전히 역전되었다. 원래는 생기있고 능동적lively, active이라는 뜻이었다. 그러나 채소가 여성의 음식이라는 관념이 생긴 후로 “여성적feminine”이고 수동적이라는 의미가 부여되었다. 철학자 헤겔은 “남녀의 차이는 동물과 식물의 차이와 같다”고 말하기도 했다.

고기는 가부장의 상징

육식은 또한 가부장의 상징이기도 하다. 많은 가정 폭력 사례에서 남편들의 일반적 변명 중 하나는 아내가 제대로 된 음식(즉, 고기)을 준비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진짜” 남자는 고기를 먹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 육식을 안하는 남성은 남성적 특권masculine privileges을 거부하는 것으로 간주된다.

제2장. 동물 강간, 여성 도살The Rape of Animals, The Butchering of Women

“돼지축산업자를 위한 플레이보이”를 자처하는 “Playboar”지에, 돼지에게 비키니를 입히고 자위 행위를 하는 포즈를 취하게 만든 사진(우르슬라 햄드레스)이 실린 적이 있다. 저자는 이 사진과 1987년 Gary Heidnik이 여성들을 강간하고 토막낸 후 다른 피해자들에게 말 그대로 “먹인” 사건을 함께 소개한다.

부재 지시대상

저자는 위 사건들이 1) 여성에 대한 성폭력과 2) 자연과 신체의 파편화 및 절단을 바라보는 서구 문화의 전통 안에서 서로 연결되어 있다고 말한다. 이러한 연결성을 설명하기 위해 부재 지시대상absent referent이라는 개념을 소개한다. (이 책 전체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 중 하나. 부재absent는 존재present와 대비되는 단어. —ak)

동물의 존재는 세가지 방식을 통해 지워진다.

  • 도축: 인간은 동물을 도축하여 더이상 동물로써는 존재할 수 없고 음식으로만 존재하게 변환한다.
  • 언어: 동물 시체의 각 부위들에 새로운 이름을 부여함으로써 동물은 언어적으로도 지워지고 음식으로 변환된다. ‘고기’라는 맥락에서 동물은 존재하지 않는 지시대상, 부재 지시대상이다. ‘고기’라는 단어는 더이상 없는 무언가를 지시하고 있다. ‘고기’의 부재 지시대상은 동물이다. 부재 지시대상으로 인해 우리는 독립적인 주체로써의 동물을 잊을 수 있게 된다.
  • 은유: 부재 지시대상이 된 동물은 다른 존재의 경험을 표현하기 위핸 은유로 사용된다. 예를 들면 ‘고깃덩이가 된 느낌이었어요’ 같은 표현이 대표적. 이 은유에서, 동물이 겪는 죽음은 여성이 겪는 삶으로 변환된다.

부재 지시대상은 존재하는 동시에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추론을 통해 부재 지시대상을 발견할 수 있으나, 부재 지시대상에 부여된 의미는 오로지 그 대상이 더이상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유지될 수 있다.

여성과 동물: 중첩되어 있지만 부재하는 지시대상

여성에게 가해지는 폭력에 있어서는 여성이 부재 지시대상이 되며, 이에 따라 “강간” 또한 다른 존재의 경험에 대한 비유로 활용되곤 한다. “자연에 대한 강간” 같은 표현이 그렇다.

어떤 용어는 특정 집단에 대한 억압과 강하게 연결되어 있기에, 이 용어를 다른 대상에 전용하는 발화는 착취적일 수 있다. 예를 들어 “강간”은 여성에 대한 폭력과 강하게 연결되고 “도축”은 동물에 대한 폭력과 연결된다. 이번 장의 제목인 “동물 강간과 여성 도축”은 그런 의미에서 문제적인 표현이지만, 여러 페미니스트들이 문제의식 없이 이러한 표현을 사용하곤 한다며 비판한다.

성폭력과 육식은 부재 지시대상 구조 하에서 서로 교차한다. 성폭력에 대한 사회적 이미지(그리고 실제 성폭력)는 동물의 도축과 육식에 대한 우리의 지식에 의존한다. “Female Sexual Slavery”의 Kathy Barry는 매일 밤 6-7명의 소녀가 80-120명의 손님을 “서빙”하는 “도축장”이라는 이름의 성판매 업소를 언급한다. 이와 유사하게, 포르노그래피의 본디지 장비인 사슬, 개목걸이, 밧줄 등은 동물에 대한 통제를 암시한다. 마찬가지로, 동물에 대한 도축에 있어서는 여성이 부재 지시대상이며, 여성의 경험이 은유로 활용된다. 유혹하는 돼지의 이미지는, 존재하지 않지만 상상가능한 “매혹적이고 싱싱한 여성”에 의존한다.

인종차별과 부재 지시대상

이러한 구조는 서구 문화에 깊게 뿌리박혀 있어 개인의 사고와 행동에 영향을 주지만 정작 개개인은 이를 인식조차 못한다. 결과적으로 여성도 육식을 하고 다른 여성을 때론 “고기”로 취급하게 된다. 인간은 동물을 도덕적 고려의 대상에서 제외시키고 빈자, 흑인, 여성을 동물과 유사한 대상으로 간주하여 학대를 용인한다.

부재 지시대상 구조는, 한편으로는 억압된 집단을 지칭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대응되는 집단을 규정한다. (“동물 강간”이라는 표현은 동물에 대한 억압을 지칭하며 부재인 여성을 규정. “여성 도축”에서는 여성에 대한 억압을 지칭하며 부재인 동물을 규정한다는 뜻이라고 이해했다. —ak)

이 구조는 인종차별과도 연결된다. 부재 지시대상 구조는 소외된 노동 형태로 동물을 제거할 조력자를 필요로 한다. 이는 육식 뿐 아니라 모피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미국 노예제도가 원주민보다 흑인을 대상으로 했던 이유 중 하나는 원주민이 모피를 공급하는 조력자였기 때문이다. 만약 우리가 부재 지시대상이 수행하는 기능을 알아차린다면, 이 구조에 연결된 두 대상에 대한 억압을 모두 비판하는 입장을 취하게 될 것이다. 일례로 민권운동가 Dick Gregory는 노예제와 도축장의 유사점을 비교한 결과, 노예제와 육식을 모두 비판한 바 있다.

성폭력과 육식

한편, 부재 지시대상은 말 그대로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억압된 대상들 사이의 연결성을 경험할 수 없게 만드는 효과가 있다. 동물 도축과 여성 학대에 대한 문화적 이미지는 너무나 깊게 서로 엮여 있기에 일부 래디컬 패미니즘 담론에서는 동물이 부재 지시대상으로 활용되어 왔다.

예를 들면 Andrea Dworkin은 포르노그래피가 여성을 “암컷 고기 조각female piece of meat”으로 묘사한다고 표현한 바 있다. (Gena Corea, Linda Lovelace, Susan Griffin 등의 사례는 생략) 각 사례에서 이들은 동물에 대한 폭력을 여성 경험을 나타내기 위한 비유로만 활용하며 그 결과 동물의 경험을 지워버린다. 이러한 담론은 동물에 대한 억압을 가부장제에 대한 분석의 틀에 통합하지 못하고 있으며, 페미니즘과 채식주의 사이의 강력한 역사적 연합을 놓치고 있다.

대상화, 파편화, 소비의 순환

저자는 여성에 대한 억압과 동물에 대한 억압을 연결할 수 있는 대안적 이론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러한 대안으로 대상화, 파편화, 소비의 순환the cycle of objectification, fragmentation, and consumption 이론을 제안한다.

  1. 대상화를 통해 억압자는 피억압자를 사물로 취급하며, 사물이기에 의지에 반하여 폭력을 행사한다.
  2. 이 과정을 통해 억압자는 피억압자를 파편화하고,
  3. 최종적으로 소비consume한다. 남성이 여성을 실제로 먹는consume 경우는 흔치 않으나 모든 남성은 여성의 시각적 이미지를 소비consume한다. 소비는 억압의 완성fulfillment이다.

고기를 비유적으로 소비하기

서구 문화에서 육식은 오랜 기간 동안 여성 억압의 비유로 쓰였다. 예를 들면 그리스 신화에서 제우스는 메티스를 강간한 후 먹어버린다. 먹기는 남성 성욕의 마지막 단계인듯 하다. 남성중심문화의 핵심 요소는 이같은 신화에 기반을 두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우리말에도 “따먹는다”, “맛있게 생겼다” 같은 식의 표현이 많이 있다. —ak)

파편화 가리기

한편 제우스 신화에는 메티스가 어떻게 잡아먹히는지 묘사되지 않는다. 도살장도 마찬가지다. 그 안에서 일어나는 일은 감춰진다. 이에 따라 마치 대상화 직후 파편화 없이 바로 소비가 일어나는 것처럼 여겨진다. 파편화는 살아있던 지시대상이 사라지는 과정이기에 우리는 이를 알고 싶어하지 않는다.

저자는 파편화의 여러 측면을 열거한다.

  1. 도구적 폭력implemental violence: 도축 시설을 필요로 하는 동물은 인간이 유일하다. 육식을 위한 신체조건을 갖추지 못했기에 시뮬레이션된 이빨과 발톱인 각종 도구를 필요로 한다. 한나 아렌트는 폭력은 항상 도구를 요한다고 말한 바 있다. 인간은 도구적 폭력 없이 육식을 할 수 없다. (아렌트는 폭력에 대하여On violence에서 “권력power, 힘force, 강인함strength과 달리 폭력violence은 항상 도구를 필요로 한다”고 말했다 —ak)
  2. 도축장: 도축장에서는 엄청난 속도로 살해와 해체가 일어나며 그 과정에서 동물은 큰 고통을 겪는다. 소설 The Jungle은 도축장 돼지의 처지를 자본주의 사회의 노동자에 대한 비유로 사용하고자 도축장의 풍경을 생생하게 묘사한다. 하지만 독자는 노동자가 아닌 돼지를 떠올릴 뿐이었다. 지시대상이 어떻게 죽고 분해되는지에 대한 생생한 묘사로 인해 부재absent 지시대상이 존재하게present되었고, 이에 따라 비유로써의 힘을 잃게 된 것이라고 설명한다.
  3. 모델로써의 해체 공정The disassembly line as model: Henry Ford는 도축장 견학 후 자동차 생산 라인의 힌트를 얻었다. 저자는 현대 자본주의가 절단과 파편화 위에 세워진 구성물이라고 주장한다. 도축장 노동자는 살아있는 동물을 미리 “고기”로 취급해야 하는 점에서 스스로의 몸으로부터도 소외되어야 한다. Ford는 노동의 의미를 절단하여 노동자가 생산적이라는 느낌은 갖지 못한채 생산성만 높이는 방법을 고안한 것이다. 조립 라인의 노동자는 인간의 파편화를 겪고 있지만 이를 도축장 모델과 연결시키지 못하고 있다.
  4. 동물 강간The rape of animal: 강간 피해자는 종종 “고기가 된 느낌”을 호소한다. 강간과 육식이 쉽게 연결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저자는 육식과 강간 모두 상대방을 움직이지 못하고 생각하거나 느끼지 못하는 사물로 간주해야 가능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육식을 정당화하기 위해 “죽어서 먹히길 원하는 동물”의 이미지를 심는 것도 유사하다. 강간 문화의 흔한 미신 중 하나는 강간 당하길 원할 뿐 아니라 즐기는 여성의 존재다. 하지만 동물은 죽고자 하지 않고 여성은 강간을 원치 않는다. 그렇기에 육식과 강간에 있어서 마취가 종종 수반된다.
  5. 여성 도축the butchering of women: 여성 폭력에 대한 비유로써의 도축은 1) 도축당하는 동물에게 가해지는 폭력을 상기시키는 한편 2) 피해 여성이 느끼는 “고기 조각이 된 느낌”을 강화하는 역할을 한다. 성적 도축은 1) 도축의 도구인 칼(포르노그래피에서는 카메라), 2) 피해자의 신체를 통제/소비/더럽히려는defile 가해자, 3) 신체 부위에 대한 페티시즘, 4) 도축된 동물의 이미지를 유발하는 육식 등의 요소로 구성된다.

저자는 (드워킨 등의) 래디컬 페미니즘 이론이 동물 착취에 언어적으로 참여하고 있다는 점을 다시 비판한다. 동물 억압을 비유로 활용하는 페미니즘 이론은 실제로 억압을 당하고 있는 동물의 존재에 대한 인식이 부족한 것이라고 말한다. 저자는 페미니즘 이론의 언어가 두 억압이 상호의존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구조를 담아내고 이러한 억압에 도전해야 한다고 말한다.

동물권 활동가 역시 동물이 겪는 일을 묘사하기 위해 강간 은유를 사용할 때 주의해야 한다고 말한다. 인간 문화에서 여성의 강간을 바라보는 사회적 맥락에 대한 분석이 선행되어야 하며, 동물 억압을 비유로 쓰되 억압의 근원이 되는 폭력에는 저항하지 않는다면 맞물린 억압구조의 인식에 실패한 것이다.

제3장. 가려진 폭력, 침묵당한 목소리Masked Violence, Muted Voices

2장에서는 부재 지시대상이 원래의 의미를 모두 잃어버리고, 비유의 대상이 되는 다른 무언가에 대한 의미만 가지게 되는 문제를 다뤘다. 이번 장에서는 고기의 진정한 의미를 제거해버리는 “언어를 통한 소비의 대상화objectification of consumption” 문제를 다룬다.

가면으로써의 언어

저자는 언어의 역할 중 하나로 폭력을 가리는 가면으로써의 언어에 주목한다. 언어는 남성male중심적일 뿐 아니라 인간중심적이기도 하다. 대부분의 독자는 ‘남성male중심’이라고 할 때 당연하게도 인간 남성을 떠올렸을 것이다. ‘동물’이라는 단어도 비슷한데, 마치 인간은 동물이 아니라는 인상을 주는 방식으로 사용된다. 또 동물은 he/she가 아닌 it으로 지칭하는 점도 주목할 부분이다. 이는 동물을 사물로 보는 태도를 반영한다.

영어에서 man은 인간이라는 뜻과 남성이라는 뜻을 모두 가지고 있다. it 또한 사물과 동물에 함께 사용된다. man/he의 범용성이 여성woman/female의 존재를 지우는 것과 마찬가지로, it의 범용성이 동물의 생명을 지우는 역할을 한다.

인간이 입고 먹고 씻는 모든 행위가 다른 동물의 죽음에 의존하고 있으나 대다수는 이를 불편하게 여기지도 않고 놀라지도 않는다. 오히려 누군가가 이를 불편하게 여긴다는 사실에 놀란다. 인간의 문화는 동물 억압을 폭넓게 수용하고 있기에 우리의 언어 또한 이를 반영하고 있다.

고기에는 여러 의미가 있으나 ‘육식’이 동물에 대한 가장 중요한 억압을 드러낸다. 피터 싱어 또한 인간이 비인간동물을 만나는 가장 직접적인 형태는 식사 시간이기에, 육식이야 말로 동물에 대한 인간의 태도를 규정하는 핵심이자, 우리가 바꿀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지점이라고 주장했다.

거짓 이름 짓기false naming

도살장을 육류 공장으로 부르고, 돼지를 햄으로 부르며, 죽은 닭을 “신선한 영계”, 목과 발과 깃털이 없는 닭을 “통whole닭”이라고 부른다. Mary Daly는 “강압적forcible 강간”이 문제적 표현임을 지적한 바 있다. 모든 강간은 강압적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인도적 도축도 문제적이다.

융합된 억압fused oppressions

언어는 또한 가부장문화에서 여성과 동물의 열등한 지위를 융합한다. André Joly의 분석에 따르면 영어에서 he는 살아있음과 권력animate+power을, it은 죽어있음과 비권력inanimate+no power을 상징한다. 젠더를 구분하는 경우 he는 중대한major 힘, she는 작은minor 힘을 뜻한다.

이름 짓기를 통해 여성과 동물의 억압을 융합하는 방식은 창세 설화까지도 이어진다. 아담에게는 이브의 이름을 짓고(타락 전) 동물들의 이름을 짓는(타락 후) 자격이 부여된다. 아담 이후로 가부장제 문화는 억압자가 피억압자의 이름을 짓고 규정하는 전통을 이어나간다.

문자 그대로 사고하기

거짓 이름은 문자 그대로의 사고와 상징적 사고의 이분법 뒤에 숨어 있다. “고기는 파편화되어 살해당한 동물의 시체다”라는 표현은 상징적 사고를 밀쳐내고 문자 그대로의 사고를 유도한다. 이는 채식주의의 메시지를 전하는 싸움의 일부다. 문자 그대로의 진실을 접한 아이들의 반응을 통해 우리의 언어가 진실로부터 얼마나 괴리되어 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아이들은 또한 종종 부재 지시대상의 의미를 복원해내려 애쓰기도 한다.

침묵당한 목소리muted voices

채식주의자는 육식을 용인하는 문화권 내에서 육식의 문제점을 설득해내야하는 상황에 직면한다. 인류학자 Edwin Ardener의 지배-침묵 이론에 따르면 “침묵당한 집단은 지배구조가 허용하는 양식에 맞춰 자신의 믿음을 전달”해야만 한다.

도축에 반대하는 주장은 감상적이거나 유치하거나 여성적인 것으로 간주되는데 이는 지배집단이 비판을 잠재우기 위해 종종 사용되는 방법이다. 한편 “여성적”으로 보이는 이유는 여성의 목소리 또한 동일한 지배구조(가부장제)에 의해 침묵당한 목소리이기 때문이다.

새로운 이름 짓기new naming

따라서 채식주의자들은 부적절한 언어를 개혁하고자 새로운 단어를 고안해왔다. 예를들어 채식주의라는 단어가 그렇다. 1847년 전까지는 육식을 하지 않는 사람을 이르는 단어가 피타고라스주의자pythagorean였다.

새로운 이름 짓기: 채식주의Vegetarianism

초기 옥스퍼드 사전은 이 단어가 vegetable에서 파생되었다고 기록하였으나 당사자들은 전체적인whole, 건전한sound, 신선한fresh, 생기있는lively 등을 뜻하는 라틴어 vegetus에서 파생되었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단순히 채식을 먹는 사람들이라는 뜻이 아닌 좀 더 철학적이고 윤리적인 느낌을 담고자 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며 단어의 의미는 중성화/일반화 과정을 거쳐 점차 퇴색되기 시작했고, 적색육을 먹지만 않으면 누구나 채식주의자라는 식의 인식이 생겨난다. 이에 따라 새로운 단어가 필요해졌다.

새로운 이름 짓기: 동물화된animalized 단백질, 여성화된feminized 단백질

“고기”라는 단어에는 동물이 존재하지 않는다. 이 문제에 대항하기 위해 “동물화된 단백질”이라는 말이 제안된다. 이 단어를 통해 감춰진 지시대상인 동물을 명백히 드러내는 것이다. 몇몇 이들은 여성 동물의 산물인 우유나 닭알 등은 “여성화된 단백질”로 명명했다.

새로운 이름 짓기: 비건Vegan

“채식주의자”의 의미가 지배구조에 의해 희석됨에 따라 1944년 Dorothy Watson은 비건이라는 용어를 제안한다. 비건은 음식 뿐 아니라 가죽, 털 등 동물 착취에서 비롯된 모든 산물을 거부하는 삶의 방식을 뜻한다. “vegan”은 “vegetarian”의 앞 세글자, 끝 두글자를 조합한 단어다.

새로운 이름 짓기: “네번째 단계The fourth stage”

제2차 세계대전 후 도입된 동물 착취 기법은 공장식 축산이라는 완곡어법으로 불리기 시작한다. 하지만 저자는 이를 육식의 “네번째 단계”로 부르기를 제안한다. 첫 단계는 초기 형태의 사냥이다. 두번째 단계는 도구를 사용한 집단 사냥인데 이때부터 활/창 등을 통해 거리를 두기 시작한다. 세번째 단계는 가축화다. 이 단계에서 육식이 크게 증가하기 시작한다. 네번째 단계는 동물의 감금imprisoning이다. 동물은 “음식”이 되기 전까진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로부터 격리되며, “고기 생산”이 산업화된다. 단계의 진행에 따라 부재 지시대상 구조에 대한 의존이 높아진다.

육식이 영양학적/진화적으로 당연하다는 생각을 멈추면, 육식과 관련된 언어들이 역사적으로 정당화 전략으로 쓰여온 측면을 자유롭게 검토할 수 있게 된다. 저항 문학은 동물에 대한 폭력의 언어를 풀어헤치고 새로운 언어를 엮어내는 시도다. 저항 문학의 핵심 중 하나는 육식인들이 채식주의자들에게 던지는 질문들을 다시 규정하는 것이다. 조지 버나드 쇼는 왜 채식을 하느냐는 질문을 받고 “품격있는 식사를 하는 이유에 대해 내가 왜 설명을 해야하는가”라고 되물었다고 한다. 다음 장의 주제다.

제4장. 육신이 된 말The Word Made Flesh

이번 장의 주제는 채식주의에 설득된 자와 설득되지 않은 자 사이의 변증법이다. 설득을 어렵게 만드는 미묘한 방해물이 존재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를 인식하지 못한다고 한다. 첫번째 요인은 자신이 설득됐기 때문에 남들도 설득되리라는 믿음이고, 두번째 요인은 육식에 관련된 정치적/문화적 힘을 드러낼 페미니즘적 분석의 부재라고 말한다. 세번째 요인이 가장 중요한데, 대화가 주로 일어나는 장소가 저녁 식사 시간이라는 점이다. 식탁에 “고기”가 있고 사람들이 육식을 하고 있는 상황 자체가 불리한 지형을 생성한다.

살이 붙은 말(words made flesh; 성경에서 “육신이 되신 말씀”으로 흔히 번역되는 표현. —ak)에는 세 가지 의미가 존재한다.

  1. 채식주의 설득이 성공해서 상대가 채식주의자가 되면 말에 살이 붙은 것
  2. 육식인이 채식에 반대하며 육식을 하면, 고기의 살점flesh과 육식인의 말이 서로를 강화한다는 뜻
  3. 육식이 전통적 서사 구조에 결합되는 미묘한 방식을 통해, 이야기에 담긴 말들과 고기의 살점은 상호교환할 수 있게 된다는 뜻 (표현이 어렵지만 2부에서 다룰 내용을 알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2부에서는 여러 페미니즘 문학에 담겨 있는 채식주의의 메시지를 분석하는데, 메시지가 작품 또는 저자의 삶에 걸쳐 여러 층위을 오가며 복잡하게 얽혀 있고, 때론 직접적으로 때론 비유적으로 드러나는 상황을 말하는 것으로 이해했다. —ak)

채식주의자의 말에 살이 붙을 때

책을 통해 채식주의자가 된 다양한 사람들의 사례를 소개한. 피타고라스 학파, 플루타르코스 등 그리스 고전기에서 시작해서, 맨더비 “꿀벌의 우화” 등을 소개.

궁지에 몰린embattled 대화

육식인과의 채식 관련 대화는 주로 저녁 식사 자리에서 일어난다. 육식인들은 채식주의자에게 각종 질문을 하며 답을 요구하곤 한다. 몇몇은 적대적이기도 하다. 페미니스트들이 “너도 탈코하냐?”를 듣는 것과 유사하게 “너도 건강염려충이냐?” 같은 말을 듣게 된다고 말한다. (원문에서 탈코는 브라 태우는 사람bra burners, 건강염려충은 health nuts. —ak)

육식인들은 또한 식물에게도 생명이 있다거나 당신이 먹는 먹는 상추랑 토마토도 고통을 느낀다 등의 말을 하며 채식주의자가 제기한 문제들을 조롱하곤 한다. (참고: 식물의 쾌고감수성)

하찮게 만들기trivialization는 육식인의 첫번째 수법이다. 식물의 고통을 묻는 질문에 진지하게 답하면 지나치게 공격적이라고 비판한다. 우리에겐 정치적, 개인적, 존재론적, 윤리적으로 중요한 문제이지만 상대는 이를 식사 중 유흥거리로 소비하는 것이다.

“하찮게 만들기” 다음은 정당성에 대한 문제 제기다. 페미니스트에 대해서는 “제 아내가 지금 억압 당하고 있는걸로 보이세요?”, 채식주의자에 대해서는 “잡식성 동물도 채식을 해야하나요?”라고 묻는 식이다. 본인들이 생각하기에 신성하고 자연스러운 관계(결혼, 본능)를 개혁하려는 급진적 시도로 몰아가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고기의 텍스트는 육식인의 말을 통해 반복recapitulate되고 우리의 말과 살은 분리된다. 이 대화에서 당신은 토끼이고 상대방은 사냥꾼이다. 당신은 사실 억압을 당하는 사람이지만 마치 육식을 재정의하고 제한하고 힘을 빼앗으려는 억압자처럼 여겨진다.

고기 이야기The story of meat

고기 이야기란 고기가 음식으로 수용되는 세계관을 말한다. 이야기에는 종결stories have endings, 식사에는 고기가 있습니다meals have meat. 동시에 이야기에는 의미가 있고stories have meat, 식사에는 끝이 있다meal have endings. 고기 빠진 식사는 의미가 제거된 이야기다. (meat에는 “고기” 뿐 아니라 “알맹이”, “핵심” 같은 의미도 있다. —ak)

인간은 이야기를 나누는 종이다. 이야기를 통해 삶에 의미를 부여한다. 서사에는 종결부가 있으며 이 종결부가 전체 이야기의 의미를 드러낸다. 육식은 동물에게 적용된 이야기이며 동물의 존재 의미를 규정한다. 동물의 삶과 몸은 인간의 이야기 재료가 된다. 이게 바로 살이 붙은 이야기word becomes flesh의 세번째 의미다.

고기 이야기는 신의 탄생, 육신의 절단, 부활로 이어지는 종교적 서사와 유사하다. 고기 이야기는 육식이 없었다면 태어나지 않았을 동물의 탄생에서 시작된다. 인간이 생명을 주었으니 빼앗는 것도 정당하다고 여겨진다. 그리고 죽음을 긍정적으로 해석하기 위해 단어를 변경한요(3장 참고). 죽은 동물은 동물이 아닌 고기로 부활한다.

이 서사에 대한 두 가지 위협이 존재한다. 바로 채식주의와 페미니즘이다. 채식주의는 동물의 죽음이 인간의 의미 부여를 통해 만회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페미니즘은 남성은 탐구하고 여성은 수동적인 가부장적 서사구조를 비판한다. 고기 이야기는 사물화되고 수동적인 여성의 위치에 동물을 넣은 것에 불과하다.

위와 같이 고기 이야기를 통해 말에 살이 붙는다고 본다면, 더 나아가서 몸이 텍스트이고 텍스트가 몸이라고 주장할 수 있을 것이다. 원상태에 있던 동물의 음식으로 변환은 원상태의 텍스트를 더 입맛에 맞는palatable 무언가로 바꾸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 결과는 동물과 텍스트의 훼손dismemberment이다. (영어 dismemberment는 신체를 절단한다는 뜻도 있고, 텍스트를 왜곡한다는 뜻도 있다. —ak)

제2부. 제우스의 뱃속으로부터From the Belly of Zeus

제5장. 훼손된 텍스트, 훼손된 동물Dismembered Text, Dismembered Animals

채식주의 문학에 대한 왜곡은 2장의 대상화, 파편화, 소비의 순환을 따른다.

  1. 대상화: 텍스트를 몇 개의 핵심 요소들로 환원하고 면밀한 검토와 비판이 가능한 상태로 만들기
  2. 파편화: 텍스트를 조각내고 맥락에서 분리하기
  3. 소비: 새로운 것이 하나도 없고 기존 육식 문화를 손상시키지 못하는 것으로 해석하기

훼손의 정의

채식주의를 훼손하는 다양한 방법이 있다. 텍스트에 담긴 채식주의 메시지를 무시하기, 채식주의를 언급하며 맥락을 빼먹기, 중요치 않은걸로 취급하기, 지배문화인 육식의 구조 안에 의미를 끼워맞추기 등.

비평적 왜곡은 페미니즘 작가도 동일하게 겪는 문제다. 텍스트가 훼손되어 소비될 운명이라면 여성도/동물도 마찬가지 운명에 놓인 것이다. 따라서 페미니스트와 채식주의자들은 가부장적 권위에 대항하는 새로운 규정을 세우기 위해, 고기의 텍스트에 대항하는 글을 생산해왔다.

전투형 채식주의자 조셉 릿슨Vegeterian-at-arms: Joseph Ritson

텍스트와 동물의 훼손을 엮은 삶의 가장 좋은 사례는 전투형 채식주의자 조셉 릿슨(조지프 리츤?)이다. 그는 텍스트에 대한 비평가들의 맹신적인 해석 비판, 맞춤법, 어원 등의 문제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육식에도 반대했고. 텍스트 왜곡, 동물 훼손 모두에 불같이 화를 내던 인물이다. 그는 도덕 의무으로써의 육식 자제에 대한 에세이라는 책을 펴냈는데 당대의 학자들은 이 책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일부는 리츤이 늙어서 정신 질환에 걸렸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리츤이 그 후에 쓴 책 아더 왕의 삶은 20세기에 이르러 선구자적인 저작으로 평가된다. 늙어서 정신 질환에 걸린 사람이 더 늙어서 선구자적 저작을 낸걸까?

글 쓰기, 채식주의 쓰기writing the literal; writing vegetarianism

채식주의에 대한 글을 쓰는 작가들은 “채식주의의 말word을 품어 전달한다bear”고 볼 수 있다. (bear는 운반하다, 아이를 낳다 등의 뜻인데 이 맥락에서는 여성이 메신저이거나 여성 자체가 메시지가 되는 등 “품어서 전달한다”고 하면 좋을 것 같아서 이렇게 옮겨봤다. —ak) 예를 들어 Margaret Homans는 Mary Shelley의 “프랑켄슈타인”이 Percy Shelley의 작품 Alastor의 언어를 다시 불러내는recall 점을 설명한다. Mary가 자신의 소설 안에 Percy의 말들을 품어 전달하는 것이다. (Percy는 Mary의 배우자. —ak)

채식주의라는 주제는 글자 그대로literal 육식을 다루고 글자 그대로literally 먹히는/소비되는 것이 무엇인지를 논한다는 점에서 글the literal에 있어서는 시금석과도 같다. 예를 들어 소설 프랑켄슈타인에서 괴물은 종의와 펜이 없기에 자연 그 자체인 나무와 돌에 글을 남긴다. 그 결과 독자는 명시적으로 자연에 쓰인 글을 얻게 된다. 괴물이 남긴 글 중 하나는, 그 자체로 자연에 대한 훼손인 동시에 자연에 대한 폭력을 상기시키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근처에 죽은 토끼가 있으니 먹고 기운을 내시오.

채식주의의 말을 담아내기

저자는 여성 작가들이 채식주의의 말을 담아내는 여러 방식들이 있다고 말한다.

  1. 이전에 쓰여진 텍스트에 담긴 채식주의의 말을 암시하기
  2. 역사 속 채식주의자를 연상시키는 인물을 묘사하기
  3. 이전에 쓰여진 채식주의 텍스트를 번역하기
  4. 죽은 동물을 언급하여 부재 지시대상을 드러내기
  5. 독자에게 채식주의자 되기를 설득하기

제6장. 프랑켄슈타인의 채식주의자 괴물Frankenstein’s Vegetarian Monster

소설 프랑켄슈타인은 해체된dismembered 조각들로 만들어진 괴물이 채식을 하는 것으로 묘사하여, 채식주의 전통을 훼손dismember하는 대신 기억re-member하려는 시도다. 이 소설은 최근 30년 사이에 폭넓은 비평적 관심을 받은 덕에 상세히 분석되었다. 그러나 괴물의 채식주의에 대해선 거의 분석된 바가 없다. 이 장에서는 이 점에 대한 문학적/역사적/페미니즘적 분석을 시도한다.

(내가 읽은 국내의 한 번역서—“프랑켄슈타인” 허밍버드 클래식 시리즈—에 실린 작가 소개는 이랬다:

지은이: 메리 셀리

영국 런던 출생 사회 사상가 W. 고드윈의 딸이며, 시인 P. B. 셀리의 두 번째 아내이다. 스위스 체류 중에 집필한 <프랑켄슈타인>(1818)은 남편과 시인 바이런과의 대화에서 착안한 작품으로, 인간의 능력을 갖춘 기괴하고 거대한 인조인간을 다루었으며 이는 오늘날 과학소설(SF)의 시초가 되었다.

메리 셀리의 아버지가 고드윈이고 남편이 퍼시 셀리라는 사실은 소개하면서도 어머니가 20세기의 저명한 여성운동가 메리 울스턴크래프트라는 사실은 소개하지 않고 있다. 또 프랑켄슈타인 박사의 피조물이 “인간의 능력”을 갖춘 점은 소개하면서도 “인간의 잔혹함과 종차별”은 닮지 않았다는 점은 소개하지 않는다. —ak)

폐쇄된 원과 채식주의적 의식

괴물은 도덕적 고려의 원 안에 동물을 포함시켰으나, 아무리 노력해도 인간들은 그들의 원 안에 괴물이나 동물들을 넣어주지 않았다. 괴물에게 있어서 채식주의는 더 포괄적인 도덕 원칙을 따르는 본인을, 스스로 자신의 창조자와 구분짓는 선언이기도 하다.

낭만주의적 채식주의의 말을 품기

비평가들은 소설 프랑켄슈타인이 메리 셀리의 삶과 배움의 정수를 담는다고 평했다. 메리 셀리는 아버지 윌리엄 고드윈을 통해 당대의 저명한 채식주의자들과 교류하였으며, 당대의 낭만주의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그 결과 낭만주의적 채식주의자가 되었으며, 당대 다른 작가들과 마찬가지로, 창세기와 프로메테우스 신화를 재해석한다.

채식주의 에덴 동산과 타락

에덴 동산에서는 모두가 채식을 했다는 해석이 일반적이다. 이에 더하여, 낭만주의적 채식주의자들은 타락에 따르는 저주가 육식이라고 해석한다. 이 해석은 선악과를 먹도록 유혹한 이브나 여성이 악의 근원이라고 여기는 가부장적 집착 대신, 저주받은 육식과 남성성 사이의 연결성을 더 주목하게 만드는 해석이다.

프로메티우스 신화

이 신화는 보통 폭군에 대한 저항으로 해석되곤 한다. 하지만 낭만주의적 채식주의자들은 불의 발견을 육식의 시작으로 간주한다. “요리”를 통해 입맛에 맞추고 폭력을 감출 수 있기 때문이다. 프랑켄슈타인의 괴물은 불을 처음 접했을 때 육식을 거부하고 과일, 콩, 뿌리를 굽는 실험을 하는 것으로 묘사된다.

황금기와 자연식The Golden Age and The Natural Diet

여러 지문들로 미루어 보아, 소설 속 괴물의 식습관은 분명 오비드의 메타모르포시스의 “황금기”와 장-자크 루소의 인간 불평등 기원론에 언급된 채식주의 메시지를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저자가 앞에서 설명했던, 채식주의의 말을 품어내는 방식 중 하나.

작은 지구에 걸맞는 식습관

괴물은 또 작은 농가에서 기르는 소를 보며 소에게 먹이는 노력에 비해 소젖은 지나치게 적게 얻어지는 비효율을 언급한다. 이는 프랑스의 생태적 채식주의자 Moore Lappés의 작은 지구에 걸맞는 식습관을 반영한 것으로 본다.

(좀 더 최근의 효율성 계산에 대해서는 Efficiency of plant-based diet 참고. —ak)

괴물의 원천인 도살장

괴물은 타락한 세상에 태어났다. 한편 몸 일부는 도살장에서 왔다는 점에서 그는 타락한 세상이 낳은 자식이기도 하다. 저자는 도살장의 동물들이 모두 초식동물이라는 점에서 괴물은 해부학적으로도 채식주의적 요소를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입막음 당한 의미를 복원하기

괴물은 채식주의 뿐 아니라 페미니즘의 의미도 품고 있다. 소설 중 DeLacey 가족의 어머니가 딸에게 지적 열망, 독립성 등에 대해 교육하는 장면은 작가의 어머니 메리 울스턴크래프트를 떠올리게 한다.

여성은 “폐쇄된 원” 밖으로 배제되어 왔다. 많은 남성 동료들은 메리 셀리를 배제해왔는데, 이에 따른 저자의 분노가 작품 속 괴물의 분노로 표현되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인간”의 원 안에 소속되길 희망했으나 배제되고 “그들”과 “우리”로 구분되어버린 괴물의 처지는 당시의 채식주의자들과 페미니스트들의 처지를 반영한다.

제7장. 페미니즘, 세계대전, 현대의 채식주의Feminism, the Great War, and Modern Vegetarianism

세계대전 이후 많은 근대 여성 작가들은 남성 지배를 전쟁과 육식의 기원으로 여기기 시작한다. 전쟁으로 인해 평화주의와 채식주의 사이의 연결점이 더 부각되었다고. 이러한 관점에서, 채식주의는 전쟁에 대한 도전으로, 평화주의는 육식에 대한 도전으로 간주되기도 했다.

채식주의자들은 의도적으로 채식주의의 말을 품어 옮기는 행위를 통해 전쟁 중인 세상에 도전했다. 7장에서는 정치적 폭력에 대한 페미니즘적 분석을 요약하고 전쟁이 채식주의를 어떻게 근대화 하였는지 설명한 뒤, 관련하여 몇몇 대표적 작품들을 분석한다. 이를 통해 20세기 여성 작가들의 작품 속에 담긴 채식주의와 평화주의의 깊은 연결고리를 드러내고, 고기의 성정치에 대한 이해를 확장할 것.

전쟁의 성 정치The sexual politics of war

1차대전 중 Olive Shreiner 등 일부 반전 페미니스트들은 여성에겐 사랑과 평화를 지향하려는 성향이 있다고 주장한다. 버지니아 울프 등 다른 이들은 성향의 문제가 아니라 남성의 지배 및 권력을 가진 여성의 부재라는 상황의 문제라고 주장했다.

Woman’s Journal 편집자이자 평화주의자인 Agnes Ryan과 그의 남편은 1차대전 중 채식주의자가 된다. 동물을 죽여도 된다는 생각은 인간을 죽여도 된다는 생각으로 이어지며 이는 전쟁의 정당화와 연결될 수 있다. 아이에게 육식을 설득하는 행위는 때론 살인도 정당할 수 있다고 설득하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말한다.

육식과 전쟁 사이에 밀접한 관련이 있다면 육식에 반대함으로써 전쟁에 대한 반대를 실천할 수 있다. Mary Alden 등 많은 여성들이 전쟁과 육식의 공통된 잔혹함을 깊게 통찰하고 있었으며 1차대전 당시 많은 페미니스트-채식주의자-평화주의자가 있었다.

세계대전: 채식주의의 근대화

반전 페미니스트들이 여성의 임파워링이 전쟁을 끝낼 길이라고 믿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채식주의자들은 육식의 철폐가 평화로의 한 걸음이라고 믿었다.

종전 이후에는 윤리적 채식주의자 이외의 작가들도 전쟁과 육식의 관련성에 주목하기 시작했다는데, 그 이유 중 하나는 바로 전쟁 경험 그 자체다. 쥐가 죽은 동료의 시체를 먹는 모습을 보고 나서는 도저히 인간과 동물의 공통점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기 때문. 철학자 Mary Midgley는 세계대전이 동물에 대한 인간의 태도에 전환점이 되었다고 주장한다. 전쟁 이후 인간과 동물의 연속성에 대한 과학적 증거 및 이에 대한 관심이 크게 증가했다고.

여성의 소설과 확장된 전선

Charlotte Perkins Gilman이 그의 종교와 그녀의 종교에서 쓴 “사냥하는 남자, 전쟁하는 남자Man the Hunter and Man the Soldier”란 표현은 상이한 두 폭력을 연결할 뿐 아니라 행위자의 성별도 강조하고 있다.

여성 작가들의 채식주의-페미니즘 소설들도 이를 상기시킨다. 이같은 전통은 동물 살해가 일어나는 모든 곳에 확장된 최전방이 존재한다는 인식에서 출발한다. 일군의 페미니스트들도 이 인식을 따르는데, 저자는 이 전통을 네 개의 주제로 분류한다.

  1. 남성의 폭력에 대한 거부. 육식이 여성을 최전방에 위치시킨다면, 육식 거부는 최전방에서 반전운동을 펼치는 것
  2. 동물과 함께 인식되기identification. 동물과 여성 모두 대상이자 소유물로 인식된다는 점을 인식하고 동물과 연대하기
  3. 남성의 통제와 폭력에 대한 저항수단으로써의 채식주의. 채식주의를 통해 전쟁하는 세상 및 남성에 대한 의존을 거부하기
  4. 연결과 억압, 연결된 이상적 세계. 인간 남성의 지배는 여성억압/전쟁/육식의 원인으로, 타락the Fall 이전의 완벽한 세상은 채식주의/평화주의/여성평등으로 연결하기

채식주의의 황금 시대와 여성의 소설

Henry Bailey Stevens는 문화의 복원에서 인류학적/원예학적으로 입증된 식물 문화plant culture를 피의 문화blood culture가 대체했다고 주장했고 20세기 일부 여성 작가도 이 견해를 수용했다.

Brigid Brophy는 단편 An anecdote of the Golden Age에서 여성의 월경은 타부가 아니었으나 남성들에 의해 타부시된 것으로 묘사한다.

(이런 식의 묘사는 역사적으로 여러번 반복된다. 의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히포크라테스는 월경혈에는 독성이 있는데 그 이유는 여성이 남성과 달리 땀을 통해 깨끗하지 않은 물질을 배출할 능력을 갖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아리스토텔레스도 유사한 주장들을 했었다. 저명한 학자치고 기원전부터 20세기에 이르기까지 이런 말을 하지 않은 남성을 찾기 어렵다. 이 전통은 21세기에도 이어지고 있다. —ak)

서술 전략으로써의 끼워넣기interruption

앞서 살펴본 작품들은 페미니즘적 통찰에 기반해 채식주의와 폭력을 엮어내고 있다. 위 작품들에서 공통적으로 쓰이는 문학적 기교가 있는데 저자는 이를 끼워넣기interruption라고 부른다. 작가들은 채식주의의 메시지가 전해질 수 있도록 끼워넣기 기법을 통해 독자의 관점 전환gestalt shift을 일으킨다고 말한다.

작가는 끼워넣기를 알리는 신호를 다양한 방법으로 심어둔다.

  1. 점, 대시, “끼워넣기” 표시
  2. 상황을 통제하던 인물의 말더듬기, 멈춤, 불명료함, 혼란
  3. 음식 또는 식습관으로 이야기의 방향을 꺾기
  4. 채식주의 역사에서 중요한 인물 및 사건을 언급하기

이런 장치를 통해 채식주의 메시지를 전할 끼워넣기가 성립된다.

지배적 관점 극복하기

전장을 재정의하고 육식이 일어나는 모든 곳을 전선으로 규정함으로써 현대의 여성 작가들은 여성의 권리를 강력히 선언했다. 세계대전에서 비롯된 페미니즘, 채식주의, 평화주의의 전통은 이 전쟁이 여전히 끝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제3부. 쌀을 먹어요 여성을 믿어요Eat Rice Have Faith in Women

(“쌀을 먹어요 여성을 믿어요”는 Fran Winant의 시다. 저자는 이 문구를 두 가지 의미로 해석한다. 하나는 “채식을 하세요, 그리고 여성을 믿으세요”라는 뜻이고, 다른 하나는 “채식을 하는 것이 여성을 믿는 것입니다”라는 뜻. —ak)

제8장. 채식주의적 몸의 왜곡The Distortion of the Vegetarian Body

많은 학자들이 페미니즘과 채식주의 사이의 연합을 무시하려는 경향을 보인다. 이번 장에서는 이런 현상을 분석한다. 저자는 우선 채식주의적 몸 - 글을 쓰는 주체로써의 몸, 채식에 적합한 신체라는 의미에서의 몸 - 을 정의한다.

채식주의적 몸 정의하기Defining the vegetarian body

인간은 육식동물보다는 초식동물에 가까운 몸을 가졌다는 해부학적 근거들, 실제로 채식 위주의 생활을 했다는 고고학적 근거들, 육식과 암 또는 심장 질환 사이의 관계에 대한 의학적 근거들을 제시한다. (이 부분에는 저자의 주장과 저자가 참고한 자료 혹은 인터뷰한 인물들의 주장이 섞여 있다. 개정판 서문에 따르면, 저자는 인간이 잡식동물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으며, “채식주의적 몸”은 비유적 표현이라고 밝히고 있다. —ak)

비평적 왜곡Critical distortions

역사학자들은 채식주의를 설명explain하는 대신 해명하고 치워버린다explain away. 여러 종류의 왜곡이 있었다.

  1. 채식주의자들은 육식이 동물적 습성이라는 생각에서 육식을 피한다는 왜곡: 인간의 육식은 부자연스럽고(도구 사용, 문화적 포장 등) 불필요하기 때문에 거부하는 것이다.
  2. 채식주의자들은 보수적이어서 산업화 이전의 유럽으로 돌아가고자 한다는 왜곡: 오히려 그 반대로, 6장에서 살펴본 바에 따르면 당시 낭만주의적 채식주의자들은 정치적으로 극단적radical 개혁주의 성향이었고, 채식을 식습관의 개혁reform이자 진보적progressive 식습관으로 간주했다.
  3. 개인에 주목하여 왜곡: 예를 들면 히틀러도 채식주의자라는 주장. 이 주장은 논리적으로 불건전할unsound 뿐 아니라 사실 관계 또한 틀렸다. 히틀러가 채식주의자라는건 나치 선전 캠페인에 의한 과장.
  4. 채식주의자를 인종차별자로 몰아가려는 왜곡. 이러한 왜곡이 존재한다는 맥락에서 볼 때 Pat Parker의 나의 채식주의자 친구에게라는 글은 문제적이며 동시에 시사하는 바가 있다. 자신의 육식을 비판하는 친구에게 Parker는 본인이 먹는 돼지 곱창, 목뼈, 꼬리는 여러 세대에 걸친 노예제와 인종차별을 견뎌낸 조상들과 이어진 음식이라고 설명한다. Parker의 글은 인종차별과 채식주의의 충돌로 보이지만 저자(Carol J. Adams)는 달리 해석한다. Parker가 지지하는 육식은 (비록 Parker는 그렇게 여기지 않더라도)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네번째단계 육식”(3장 중 “새로운 이름 짓기” 참고)이 아니다. Parker가 먹는 현대의 육식과 과거 그의 조상들이 먹었을 육식 사이에는 엄청난 괴리가 존재한다. 한편 Parker는 음식의 제의적ritual 의미도 강조하고 있는데 저자는 이 점을 부정하지 않고 다만 채식에 기반한 소울 푸드도 가능하다는 점을 언급한다. 반면 조상의 억압에 대한 은유로 육식을 언급하는 전략(곱창, 목뼈, 꼬리 등의 은유적 활용)에 대해서는 비판적인 입장인데, 왜냐하면 동물에 대한 폭력을 다른 대상에 대한 은유로 활용하는 전략은 부재 지시대상 구조에 기여하는 면이 있기 때문이다.

여성의 역사가 감춰졌고, 그 안에 담겨 있는 채식주의의 메시지가 왜곡되고 감춰진 점에서, 페미니즘-채식주의의 연합은 이중으로 감춰져 있다. 페미니즘 비평에서 채식주의부재 지시대상이 되고 만다. 가볍게 만들고, 개인적 특성으로 치부하고, 성/권력/정치 등 다른 주제에 비해 부적절한 것으로 간주된다.

섹슈얼리티와 채식주의적 몸Sexuality and vegetarian body

저자는 기존의 작가들이 채식주의적 몸을 논하며 여성적/남성적 몸이 아닌 인간human의 몸만 이야기했다는 점이 흥미롭다고 말한다. 그래도 그런 논의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일례로 19세기에 채식주의를 널리 알린 Sylvester Graham은 페미니즘에 엇갈리는 유산을 남겼다. 그래햄은 채식주의를 널리 알린 한 편, 육식이 남성기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우스꽝스러운 주장을 함으로써, 비판자들이 페미니즘-채식주의를 놀려먹을 거리를 하나 더 제공한 면이 있다. 그는 육식이 지나치게 남성을 성적으로 자극한다고 주장했다.

부부 강간, 아동성학대 등의 문제를 고려하면, 남성 섹슈얼리티의 통제에 대한 논의는 페미니즘의 적절한 주제가 맞다. 저자는 다만 육식을 성적 충동의 원인으로 지목한 점이나 자위행위를 부도덕한 것으로 취급한 점 등이 문제라고 말한다.

19세기 여성에게 그라함주의는 힘든 주방일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하는 동시에, 채식을 통해 가족이 건강해지면 주로 여성의 역할이었던 병수발로부터도 해방된다는 점에서 이중의 해방으로 여겨졌다. 채식주의는 또한 여성 사이의 교류를 장려할 것으로 기대되기도 했다. 또 당시 여성들은 채식이 산고를 줄여주며 건강한 아이를 낳을 수 있게 해준다 여겼다고 한다. 이는 많은 여성들이 채식을 하도록 설득하는 요인 중 하나가 되었는데, 버지니아 울프의 친구 M. W. Davies가 편집한 책 모성: 일하는 여성들의 편지에도 유사한 주장이 담겨 있었다.

한편 육식은 남성기에 과도한 압박을 가하는 자극적 음식이라는 발상으로 인해, 채식주의는 남성의 금욕 및 남성 섹슈얼리티에 대한 통제 수단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몇몇 여성 채식주의자들은 섹스를 즐길 권리를 옹호하기도 했다. 이런 이유로 채식주의는 유토피아의 식습관으로 간주되곤 했다.

고기 공포증? A meat phobia?

저자는 “음식”에 대한 채식주의자들의 반응을 지배 문화에 속한 자들이 종종 공포증으로 부르는 현상을 두고 “해석을 통제하고자 하는 이름짓기 강박”이라고 말한다. 육식을 반대하는 현상에 도저히 긍정적 이름을 부여할 수 없는 것.

체화된 의미embodied meanings

여성을 침묵시키는 가부장적 문화에서 여성적 의미가 발화될 방법은 무엇일까. 저자는 여성적 음식으로 인식되던 채식을 통해 지배 문화에 대한 반대를 표현하고자 했을 수 있다고 말한다. Caroline Bynum의 연구에 따르면 남성보다는 여성이 음식이 상징으로 활용한 사례가 많았다고.

동물의 몸엔 의미가 담겨 있고 그 의미는 몸이 고기가 된 후에도 사라지지 않는다. 그리고 우리의 몸은 음식 선택을 통해 의미를 표현한다. 저자는 채식주의적 몸의 연결을 통해 부재 지시대상 및 몸에 의해 매개되는 지식을 복원할 수 있다고 말한다.

제9장. 페미니즘적 채식주의 비평 이론을 향하여For a Feminist-Vegetarian Critical Theory

페미니즘 역사의 주요 순간들, 여성 문학의 주요 인물들은 페미니즘과 채식주의를 결합하며 연속성을 드러내왔다. 페미니즘적 채식주의 이론의 개발은 이러한 연속성의 인식에 기반을 두고 있다.

육식은 남성 지배 구조에 결합된 일부이기에, 채식주의는 가부장제 문화에 불편/질병dis-ease을 야기하는 상징으로 작용합니다. (질병disease과 안락함ease의 부정dis을 동시에 표현하려는 의도에서 하이픈을 넣은 것 같다. —ak)

17세기부터 20세기에 이르는 페미니즘-채식주의 사이의 여러 문학적/역사적 연합의 사례를 볼 때 페미니즘적 채식주의라는 문학적, 역사적 전통이 있었음이 자명하다.

페미니즘과 채식주의의 역사 재구축하기reconstructing the history of feminism and vegeterianism

페미니즘적 채식주의 비평 이론은 가부장적 세상에서 여성과 동물이 유사한 위치, 즉 주체가 아닌 객체의 자리에 놓인다는 점에 대한 인식에서 시작된다. 예를 들어 모세의 십계명은 남성이 여성과 동물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지시하고 있다. (“네 이웃의 아내나 남종이나 여종이나 소나 나귀 할 것 없이 네 이웃의 소유는 무엇이든지 탐내지 말라”) Brigid Brophy는 산업화된 서구 사회의 여성은 동물원의 동물과 같다고 주장한 바 있다.

부재 지시대상이라는 가부장적 구조를 통해 여성억압과 동물억압은 중첩되기에, 이 중첩된 억압을 타파하기 위해서는 페미니즘과 채식주의의 연합된 도전이 필요하다. 그러나 이 억압은 여성과 동물이 각각 따로 경험하기에 여성운동과 동물운동도 분절되곤 한다.

가부장제를 사수하고자 하는 지배 세력들은 여성운동의 근거가 동물운동의 근거로 이어질 것으로 간주하곤 하는데, 이 또한 두 억압의 연합이 드러내는 현상 중 하나다. 예를 들어, 19세기 여성참정권 운동에 대해 당시 한 남성은 “다음엔 뭐, 소라도 교육시킬텐가?”라고 비아냥거렸다고 한다. 여성의 권리 옹호가 출판되자 이에 대한 패로디 저작인 짐승의 권리 옹호가 나온 것도 같은 맥락이다. (피터 싱어에 따르면 저 익명 패러디 저작의 작가는 캠브릿지 대학의 철학자 토머스 테일러다.)

페미니스트-채식주의자-레즈비언(또는 호모소셜)의 연결 또한 존재한다. (여기서 말하는 “호모소셜”은 이브 세지윅이 “남성들 사이의 성적이지 않은 유대”를 뜻하는 의미로 제안한 호모소셜homosocial(즉, 알탕연대)는 아닌 것 같다. —ak)

저자는 채식주의가 주체적, 독립적 여성의 정체성으로부터 분리될 수 없는 일부라고 말한다. 채식주의는 사실상 지배 구조에 대한 저항이었다.

채식주의 여정The vegetarian quest

저자는 채식주의를 수용하려는 사람이 거치게 되는 채식주의 여정의 세 단계 패턴을 제안한다.

  • 1단계: 고기의 부재 깨닫기
  • 2단계: 동물과의 관계에 이름짓기
  • 3단계: 육식하는 세상에 대한 비판

첫단계는 음식으로써 고기가 갖는 부재성nothingness 깨닫기revelation다. (reveal엔 종교적 “계시”라는 의미도 있다. 신이 뜻을 살짝 드러내는 느낌 —ak) 무언가something/누군가someone였던 동물이 무no-thing(또는 존재가 아님)/아무도 아님no-body(또는 몸이 없음)으로 변하는 과정을 인식하는 단계. 이 깨달음은 부재 지시대상의 구조에 대한 인식을 수반한다. 깨달은 후에는 우리가 음식이 아닌 시체를 먹고 있음을 알게 된다. 단, 고기의 부재에 대한 인식이 채식주의로 이어지기 위해서는 맥락과 해석이 필요하다.

따라서, 여정의 두번째 단계는 관계에 이름짓기다. 여기에서 말하는 관계란, 식탁 위 고기와 살아있는 동물 사이의 연결, 우리와 다른 동물들 사이의 연결, 윤리와 식습관 사이의 연결, 육식의 불필요한 폭력에 대한 인식 등을 말한다. 해석을 통해 고기의 부재성이 동물 살해의 부당함에 대한 확신으로 옮겨진다. 관계에 이름을 짓는다는 행위의 한 측면은, ‘고기’ 대신 적절한 단어들을 되찾는 것을 포함한다. 완곡어법, 왜곡, 잘못된 이름 대신, 인간이 스스로와 동물의 관계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지에 대한 비전을 제시하는 새로운 단어들을 만드는 행위다.

여정의 마지막 단계는 육식하는 세상에 대한 비판rebuke이다. 채식주의자들은 실천을 통해 육식에 대한 대안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드러냄으로써 육식하는 세상을 비판한다. 건강한 채식주의자들의 존재는 ‘채식주의적 몸’을 입증한다. 많은 채식주의자들은 가능성의 입증에 그치지 않고 세상을 바꾸고자 한다.

채식주의는 또한, 그저 육식하는 사회를 비판할 뿐 아니라 가부장적 사회도 비판한다. 앞 장들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육식은 남성 권력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 이와 같이 “채식주의 여정”의 존재를 인식하면 개별 여성들의 역사적 행위들을 좀 더 풍부한 맥락 하에서 왜곡없이 해석할 수 있게 된다.

채식주의적 의미와 문학 비평Vegetarian meaning and literary criticism

채식주의는 상상을 실천하는 것이며, 고기의 텍스트에 대한 대안을 상상할 수 있는 능력이기도 하다. 5장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여성의 소설들에는 여러 방식으로 채식주의의 메시지가 담겨 있다.

채식주의적 여정이 고기의 부재를 드러낸다면, 페미니즘 소설에서는 죽은 새의 이미지가 살아있던 어떤 존재some-oneness를 드러낸다. 영화 새The Birds에서의 닭고기, 소설 슈팅파티에서 죽은 수백명의 새 등은 존재하지 않는 지시대상 구조를 폭로하는 장치다.

채식주의의 현상학은 글쓰기의 현상학과 상통한다. 둘 다 언어를 장악하고, 빈틈과 침묵을 드러낸다. 채식주의의 현상학은 동물과 동물의 운명을 드러내기, 언제 말하고 언제 침묵할지 등 발화의 문제, 음식 선택, 육식을 허용하는 가부장적 신화에 의문 던지기 등을 포함한다.

채식주의적 몸에 대한 페미니즘적-채식주의적 독해

페미니스트는 남이 못보는걸 보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남들도 보는걸 다른 방식으로 볼 뿐입니다. 페미니즘적 의식이란, 조심스럽게 말하자면, “사실”을 “모순”으로 바꿔냅니다. –Sandra Lee Bartky.

지배 문화의 식습관에서 벗어난 식습관을 선택한 이들을 진지하게 고려하지 않는다면, 여성의 삶에 대한 진실을 말했다고 볼 수 없다. 채식주의가 삶에 긍정적 영향을 주지 않았다면 이를 선택하고 유지하고 전파하려 했을리 없다. 학자들은 이 역사적 사실을 수용하고 이에 답해야 한다.

많은 페미니스트들이 채식주의를 실천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활동과 저작은 이들이 육식에 대해 이야기한 바를 적절히 인식하지 못한 채 분석되어 왔다. 이제는 이 문제를 더 상세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페미니스트이자 채식주의자인 이들은 스스로의 행동에 어떤 의미를 부여했을까, 이들은 어떤 종류의 타협을 해왔을까, 얼마나 많은 작가나 활동가가 채식주의자였거나 자신의 작품에 채식주의를 반영했을까, 이들 사이에 어떤 교류가 있었을까, 육식을 하는 페미니스트들의 견해는 무엇이었을까 등의 질문을 던지고 답해야 한다.

채식주의는 가부장적 소비, 죽음의 소비에 대항하는 수단이다. 죽음을 소비하는 대신 삶을 기리고 부활한 동물이 아닌 동기부여된 사람들에 의지하는 그러한 대안적 세계관의 존재를 선언하는 활동이다. (여기에서 부활이란, 마거릿 애트우드의 “동물이 죽기에 인간의 삶이 허락 받는다. … 우리는 죽음을 먹는다. 죽은 예수의 육신Christ-flesh이 우리의 몸 속에서 부활하여 우리에게 삶을 제공한다”는 표현에서 차용한 것 —ak)

에필로그 - 가부장적 소비를 불안정하게 만들기Destabilizing Patriarchal Consumption

지배 담론이 육식을 허용하기에, 우리는 우리가 죽은 동물을 먹고 있다는 사실을 수용하고 무시하고 중립화하고 참아낼 것을 강요당한다. 이 모든 강압의 함의는 무엇일까.

가부장적 문화 내의 여성의 위치에 대해서도 추가적 고려가 필요하다. 여성은 삼켜진 자이자 동시에 삼키는 자다. 소비하는/먹는consume 자이자, 소비되는/먹히는 자다. 여성의 배에는 귀가 없기에 듣지 못하지만, 듣지 못하는 이의 배 안에서 목소리를 내고자 하는 자다.

육식은 가부장적 가치의 반영이자 표상이며, 매 끼니마다 남성 권력을 새겨 넣는 역할을 한다. 가부장적 시선은 도축된 살덩이나 죽은 동물이 아닌 맛있는 음식을 본다. 고기가 남성 지배의 상징이라면, 고기의 존재는 여성에 대한 무력화를 선언하는 것이다.

여러 비기술적 사회들의 재의ritual에서 고기는 아버지를 상징하며, 아버지에 대한 적대감을 동물을 죽임으로써 해소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죽은 동물은 조상에게 물려받은 권력을 아들에게 넘겨준 아버지를 상징한다. 고기는, 권력을 둘러싼 부자 간의 긴장 해소에 대한 은유가 된다.

우리는 대체로 정상적인normal 다 자란 남성(수컷) 동물을 먹는 일이 거의 없는데 어떻게 육식이 아버지의 상징이 됐을까. 아버지 은유는 장막 뒤 현실을 감추고 있다. 감춰진 현실은 부재 지시대상의 구조다. 우리가 실제로 먹는 것은 주로 어머니(암컷)이다.

가부장적 권력의 상징을 먹으며 어찌 가부장제를 타파할 수 있을까. 자율적이고 반-가부장제적 존재는 분명 비건이어야 한다. 가부장적 소비를 흔들기 위해서는 가부장적 식사를 중단시켜야 한다.

가부장적 소비를 흔들고자 한다면, 쌀을 먹고 여성을 믿어야 한다. 이를 통해 우리는 제우스의 뱃속에서 메티스를 해방시킬 수 있다. 인간과 인간, 인간과 동물 간 단절된 관계를 다시 완전하게 만들 수 있다.

쌀을 먹어요 여성을 믿어요. 우리의 음식 선택이 우리의 우주론cosmology과 정치에 반영될 것이다. 또는 이렇게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쌀을 먹는 게 곧 여성을 믿는 것이다eating rice is faith in women”.

이러한 우아함 속에서, 우리 모두 배부를 수 있기를On this grace may we all feed.

10주년 기념판 서문

초판 서문은 “내가 채식주의자가 된 이유는 나의 페미니즘과 무관했다. 적어도 당시엔 그렇게 여겼다”는 문장으로 시작. 이 문장은 1975년 Mary Daly 교수의 페미니즘 윤리학 수업 때 제출한 논문의 첫 문장이었다고 한다. 저자는 그를 기리는 의미에서 이 문장으로 책을 시작했다고 밝힌다.

10주년 기념판 서문에서는 이 책을 쓰게 된 계기와 과정을 설명한다.

페미니즘은 젠더 이분법에 대한 도전이기도 하지만 인간과 비인간 동물의 관계에 대한 사회적 구성을 분석하는 도구이기도 하다. 9장에서 “페미니스트란 사물을 다르게 보는 사람들”이라는 Sandra Lee Bartky의 말을 인용한 바 있다. 저자는 어쩌다가 육식을 다르게 보게 되었을까.

예일 신학교 1학년 마칠 무렵, 집에서 기르던 말이 총에 맞아 죽는 사건을 겪는다. 저녁에 햄버거를 먹다가, 말과 소가 어떻게 다르길래 말의 죽음만 애도하게 되었는지 생각하게 되었으며 그 순간 진실을 깨닫고 햄버거 먹기를 멈췄다고.

그러나 당장 완전히 변한 것은 아니고, 다음 해에 페미니스트이자 채식주의자인 룸메이트와 함께 살며 본격적으로 채식주의자가 되었다. Mary Daly 교수는 페미니즘-채식주의 주제를 더 연구할 것을 장려하고 여러 관련 자료를 소개해주었다. 이 때의 연구는 Amazon Quarterly 저널과 The Lesbian Reader 1975년호에 게재된다.

1976년, 출판 등 여러 제안이 있었으나 아직 미완성이라고 생각하여 거절한다. 이후 가정폭력피해자 지원 등 사회 활동을 시작하였으나, 햄버거 먹는 반여성폭력 활동가, 채식주의 외면하는 페미니즘 전기 작가, 가죽옷 입은 반전 활동가 등을 보며 지속적 단절감을 느꼈다고 한다. 분노, 소외감, 투지를 느끼며 책 쓰기를 결정한다.

시간이 한참 흘러 1987년부터, 아이를 돌보며 책 쓰기에 전념할 수 있게 되었다. 이 시기에 Margaret Homans의 Bearing the Word를 읽으며 부재 지시대상 개념을 발견했고, 이 개념이 여성억압과 동물억압을 엮어주는 핵심임을 깨달았다.

책은 거의 15년만에 완성된다.

기자들과 평론가들은 이 책을 학술 저작이라고 말하지만 저자는 스스로를 학자로 규정하지 않는다. 자신은 학문에 관심이 많은 활동가일 뿐이고 여전히 활동가라고 말한다. 10주년 기념판 서문을 통해, 이 책이 활동가에 의해 쓰여진 사실을 명확히 할 수 있어서 기쁘다고 밝힌다.

러시 림보는 자신의 쇼 프로그램에서 이 책이 추측에 의해 쓰여졌다고 비판했다.

어떤 이들은 “노숙인들은요? 여성폭력은요?”하며 인간의 고통이 우선이 아니냐 묻곤 한다. 저자는 이러한 질문이 사실은 방어적 반응일 것이라고 말한다. 오로지 육식인들만이 이러한 질문을 하곤 한다. “육식의 성정치”의 핵심 중 하나는 사회 활동을 이런 식으로 단절시키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며, 인간과 동물의 고통은 상호연결되었기에 우리는 이를 양극화시킬 수 없다고 말한다.

“육식의 성정치”가 주장하는 바는, 우리의 세상에 젠더 정치가 구성된 방식이 동물, 특히 우리가 먹는 동물들에 대한 우리의 관점과 연결되어 있다는 점이다. 남성성은,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육식에의 접근 및 타인의 몸에 대한 통제를 통해, 우리 문화에 구축되어 있다.

이 책에 담긴 25년 전(2020년 기준으로는 45년 전. —ak) 통찰이 여전히 유효할까? 슬프게도, 지금이야말로 더 적절하다고 말한다. 육식의 성정치는 문화적으로 더욱 확장되었다. 양적인 증가 또한 마찬가지다. 초판본에서 식량을 위해 죽임당하는 6억명 동물에게 이 책을 바친다고 썼으나, 이제는 매년 9.5억에 이른다.

지난 10년간 공장식 축산이 환경에 미치는 영향과 동물에 대한 비인간적 처우에 대해 더 많이 알려졌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육식인들은 여전히 육식이 인간적인 식습관이라고 믿고 있다.

출간 이후 고민 중 하나는, 여성이 여성 억압 문제에 집중하는 것을 동물권 운동이 방해한다는 생각이었다고 한다. 약 80%의 동물권 운동가는 여성이기 때문이라고. 하지만 세계 곳곳에서 두 이슈가 연결되었음을 인지하고 둘 모두에 참여하는 여성들을 만나 왔다는 점을 이야기하고 있다.

“채식주의적 몸”에 대해

저자는 인간이 잡식동물로 진화했음을 알고 있으나, 여러 취재원들은 인간이 생리적으로 초식성이라 믿고 있었다고 한다. “채식주의적 몸”은 은유적 표현이나, 채식주의자가 된다는 것의 변혁적 본질 나타내는 표현이기도 하다. 인간 자체는 진화하지 않았으나, 채식주의자와 비건은 어떻게 보면 채식주의적 몸을 진화시킨 것이다.

본질주의라는 비판에 대해

저자는 여성이 본질적으로 더 “보살핌”에 능하고 평화적이라는 식으로 생각하지 않는다고 밝힌다. 본문에 담긴 그러한 내용은 여러 취재원들의 생각을 옮긴 것이라고. 다만 저자는 권력을 가지지 못한 집단이 이러한 문제에 더 민감할 수 있다는 점, “보살핌”이 중요하다는 점도 믿는다고 밝힌다.

페미니즘과 채식주의 사이에 연결고리는 무엇일까. 저자는 단지 채식주의가 지배 구조에 대항한다는 이유만으로 이를 채택해서는 안된다고 말한다. 채식주의는 선제적이며 변혁적일 뿐 아니라 맛도 좋다delicious. 채식주의가 담아내고자 하는 정의란, 호모 사피엔스 종 범위를 뛰어넘어 확장될 수 있는 개념이어야 할 것이다.

20주년 기념판 서문

비건 음식은 맛이 없고 페미니스트들은 청교도라고 여겨지곤 한다. 이들은 “육식의 성정치”에 담긴 논리를 수용하면 뭔가 희생해야 한다고 여긴다. 하지만 책의 핵심 메시지는 인간/동물/환경 모두에게 더 나은 다른 선택이 존재한다는 거다.

10주년 기념판 서문에서 설명한 바대로, 이 책은 사회운동의 결과다. 책에 담긴 이론은 사회운동에 발담그고 있는engaged 이론이며, 분노에서 발현된 이론이고, 무엇이 가능한가에 대한 비전을 담은 이론, 비판 뿐 아니라 더 나은 대안을 제시하는 이론이다.

육식의 성정치란 여성을 동물화하고 동물을 여성화하는 태도이자 실천을 말한다. 육식의 성정치란 또한, 남자에겐 고기가 필요하고 육식의 권리가 있으며 육식은 남성의 정력virility과 관계된 남성적 활동이라는 믿음이기도 하다.

초판본이 나올 무렵 자크 데리다의 “잘 먹기Eating Well”가 영어로 출판되었다. 그는 이 글을 통해 육식-남근-로고스중심주의carno-phal-logocentrism 개념을 소개한다. 저자는 대륙 철학의 권위자인 Matthew Calarco에게 “육식의 성정치”와 데리다 사이의 교차점에 대한 의견을 구했다고 한다. M. Calarco에 따르면, 두 연구 사이의 가장 명백한 연결고리는 두 사람 모두 주체가 된다는 것에 있어서 육식이 핵심적임을 강조한다는 점. 둘 모두 육식이 전통적 관점의 주체성, 특히 남성 주체성의 핵심에 놓여 있음을 명시적으로 밝힌다는 점에서 통하는 면이 있다.

지배dominance란 끊어지고 파편화된 문화에서 가장 잘 작동한다. 그리고 페미니즘은 단절된 연결성을 재인recognize하는 운동이다. 저자는 “육식의 성정치”에 담긴 내용이 더이상 옳지 않은 그런 세상을 상상하고 이를 실재하게 만들기 위해 함께 실천하길 권하며 서문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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